대학 시절부터 술 잘 마시기로 유명했던 세 친구.
합법적으로 음주를 할 수 있는 시기인 대학생 새내기가 되면 이미 술을 마셔본 선배들의 장난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죠. 안주 없이도 곧잘 덤벼드는 남자들까지 주량으로 거뜬히 넘겨버렸습니다. 이제는 서른을 앞두고 있는 강지구와 한지연, 그리고 안소희. 자세히 보면 너무나도 다른 성향을 가진 그녀들이 오랜 친구 사이로 지낼 수 있는 이유는 말보다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서로의 면전에 욕설을 퍼붓고 헤어진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심장이 터져라 달려가는 차가운 도시에 여자들의 뜨거운 우정 이야기.
예상치 못한 배우들의 케미스트리.
아이돌 출신이었던 정은지 씨의 연기를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극 중 강지구는 모친의 영향으로 한 여자 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했습니다. 교내에서 벗어나자마자 흡연 욕구를 채우는, 한국 정서가 그리는 전형적인 교사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첫 제자인 박세진(신지효 배우)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교직을 그만두고, 세상과 단절하듯 집에 틀어박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직업은 종이접기 유튜버. 그동안의 인생의 기로에서, 자의로 방향성을 선택하지 못했던 그녀가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한선화 씨 역시 유명했던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습니다. 웃음소리부터 제스처까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멈출 수 없는 현대인들로 가득한 도시와 더욱 대조적인 느낌을 주는 그녀의 직업은 요가 강사입니다. 복잡한 고민을 하는 두 친구들이나, 요가 학원의 수강생들에게 늘 명쾌한 해답을 주는 한지연. 바보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숨은 천재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에게도 아프고 힘든 기억은 있었는데요, 행복하고 편해 보이기만 하는 단면만으로 누군가를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경각심마저 일으켰습니다. 이선빈 배우가 맡은 안소희 역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 부조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하는 직장인의 전형을 대변하는 역할이었습니다. 무능력한 상사의 궤변에 해결책을 고민하느라 바빴던 그녀는 어느 날, 그 상사와 스캔들에 휘말리게 됩니다. 직장 내의 일반적인 연애도 가십거리가 되기 쉬운데, 하필 상사는 인턴사원과 풋풋한 연애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결국, 인턴사원에게 고소를 하겠다는 통보를 받게 된 것으로 모자라, 그녀가 물심양면 케어하던 후배들의 자신을 향한 험담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합니다. 최선을 다해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사회생활, 그 일면을 보여주는 그녀는 한물 간 예능 방송의 작가입니다.
꿈 많았던 대학 시절을 뒤로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우리.
누구나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갖고 살아가지만, 나와 다른 길을 가는 친구들에 대한 이해도는 점점 떨어지게 됩니다.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다는 말이지요. 대학 시절부터 그녀들이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명분이 '술'이라는 단순한 점이 좋았습니다. 관계의 시작과 지속에는 대단한 이유가 없는 것이 때로는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연애를 거쳐 결혼으로 가는 전개가 주된 내용이었던 전형적인 양산형 드라마들에 비하면, '술꾼 도시 여자들' 은 현대의 젊은 여성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극중 안소희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무능력한 직장 상사와 사랑에 빠지고, 아끼던 후배들에게 뒤에서 욕을 먹는 것마저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입니다. 국내에서는 꿈의 직업 중에 하나라고 여겨지는 교직을 포기한 강지구의 이야기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누구나 거쳐간 '교사' 들도 처음부터 완벽한 선생님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어른인 척 학생들 앞에 섰던 그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꼭 직업을 특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완성인 채로 어른이 되어, 매일이 공허하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생계를 위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대놓고 날카롭고 우울한 강지구와 대조적으로 늘 밝은 모습의 한지연은 사실 다른 친구들이 서서히 겪을 일들을 미리 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라는 속담을 이미 몸소 확인한 겁니다. 가족의 장례와 같은 힘겨운 일도 가장 먼저 치렀고, 말만 들어도 철렁할 중병도 겪게 됩니다.
끝까지 쾌활한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지난 풍파를 견디며 자연스레 생겨버린 강단과 여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세 사람이 겪는 일들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을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잘 풀어낸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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